1. 프로이트에 따르면 투사란 다음과 같다. 자아가 보유하기 힘든 일체의 것을 상대방에게 던져버림으로써 비난할 것은 내가 아닌 상대방으로 상정해버리는 것. 따라서 투사받는 상대의 경우 주로 억울함을 느끼기 때문에 투사하는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게 되고, 외로워진다. 다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투사하지는 않는 것은 가능한가? 혹은 모든 투사란 나쁜 것인가? 모든 텍스트와 타인에 대한 해석은 결국 나의 해석이며, 그것들은 사실 텅빈 스크린으로써 사실상 나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에 불가하다면? 모든 관계는 상상적인 나와 상상적인 타자와의 관계이기에 타인에 대한 모든 해석은 결국 나에 대한 해석의 변주곡일 뿐이라면? 결국 타인에게서 보이는 것은 나의 관점일 뿐일 수 있다. 요는 다음과 같다. 타인에 대한 해석, 판단, 규정, 분석 등등은 결국은 타인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나에 대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볼 수 있는 것만을 본다. 

내가 받았다고 판단되는 투사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얼마 전 박사 선배는 나의 공개발표전 나의 글을 보고,' 날라리'같다는 평을 했다. 또한 얼마 전부터 한 후배는 나를 보고 계속 '찐따'같다는 말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몇 해전 한 선배는 누군가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했다. 나는 이들이 날린 언어들이 사실 모두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혹은 자기가 혐오하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대상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결국 투사라는 것은 자기 보호의 기제의 일종인 셈이다. 

허나 나의 글을 보고 '날리리'같다고 했던 선배는 그 누구보다 내 옆에서 붙어서 내 글이 날튀나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다. 나를 '찐따'라고 부르는 후배는 나에게 자주 전화해주며, 내가 진따같은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옆에도 도와주고 있다. 질문이 돌아온다. 투사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아니 이러한 경우 투사에 대한 정의에서 벗어나는 '비판'의 영역이 아닐까?

결국 나는 비판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모든 비판은 결국 나의 해석이기에, 비판의 깊이는 자기 성찰의 깊이에 비례한다. 동시에 비판은 투사가 아니기에 나와 상대방을 동시에 고양시킨다. 비판은 상대방 혹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상대방 혹은 텍스트를 부정적인 상태에서 긍정적인 상태로 변화시킨다. 비록 그것이 부정적인 형태로 규정된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비판은 부정적인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판의 목적은 대상에 대해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혹은 대상의 상태를 파열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에. 그러나 투사의 경우는 그 목적은 그 대상을 부정적인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은 대상을 긍정적인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현실을 조작하는 반면, 투사는 대상을 계속 부정적인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현실을 조작한다.  


하..글이 날카롭게 나오지 않는다... 어째던 올해 나는 너무나도 많은 투사를 받아왔던 해이다. 자신의 옮음 속에 머물기, 자아를 보존하기 위해서 나에게 내린 부정적인 판단들이 지긋지긋했던 한 해이다. 어떻게든 내게 투사를 했던 이들을 혐오하지 않고, 이해하고 싶었다. 약간의 우연의 손길이 뻗쳤다면, 나 역시 투사의 주체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 역시 투사의 주체였을지도 모르니.. 역설적으로 이는 투사에 대한 성찰 이후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2. 타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보니, 사실 가장 심각한 나의 자기분열을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오늘 정경대에서 근무 중인 조교 친구에게 나는 속사포 쏘듯이 나의 현재 자기분열 상태에서 30분 동안 실컷 취한 채 떠들었다.(나는 사실 한국에서 거의 가장 편한 조교일을 하고 있다. 야호)  그는 아직까지 아픈 할머니가 집에 와있다는 핑계로 졸업이 연기된 것을 부모님께 말하지 않은 것들이 문제가 가장 큰 핵심이자 해결점이라고 힐난했다. 나도 참 헛똑똑이였구나..


3. 할머니의 한 쪽 눈이 컨디션에 따라서 떠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는 그것으로 유쾌하게, 기분 나쁘지 않게 할머니를 놀렸다. 수명의 끝자락이 담담하게 희극화되는 장면은 괜히 보기가 좋았다. 나의 수명 끝자락은 누구와 함께 보낼까, 어떻게 보낼까. 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유쾌하게 맞이하고 싶다. 


4. 할머니 때문인지, 밖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상상적 노년이 겹쳐보인다. 그러다가 이내 아무리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 역시도 그들의 생기있는 살갓, 화려한 옷 대신 백골로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골들이 걸어다닌다. 거울 속에도. 


5. 요즘은 집에 놀러와 있는 이모네 집 강아지와 놀 때가 가장 안정감이 든다. 수염을 자르다가 얼굴이 긁혀 생긴 트라우마로 그의 얼굴을 잘못 건드리면 나를 문다. 그리고 화를 냈다가도 이내 울면서 나에게 다가오면, 우리는 글썽이면서 꼭 안고 서로 사과를 한다. 나도 모르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실은 내가 화해가 필요한 다른 관계에 대한 대리 충족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6. 타블로는 앞으로의 랩퍼의 길보다는 하이그라운드의 수장으로써의 길에 훨씬 더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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