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 둘은 개강 첫날 재학생들의 생경한 패션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흡사 그것은 교복의 부활이었다. 그것은 바로 학교 잠바의 유행이었다. 너도나도 등에 대문짝만하게 ‘KYUNG HEE UNIV.’가 적힌 학교잠바를 입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경희대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심가 어디에서나 자신의 모교 이름이 박힌 이른바 ‘학교 잠바’를 입은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나는 연세대를 놀러가서는 대략 80%학생들이 학교 잠바를 입고 있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오늘날 유행에 민감한 20대들은 옷차림이 촌스럽다는 말을 듣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자신들과 똑같은 옷이나 똑같은 악세사리를 한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20대가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패션을 취한다는 것은 매우 특수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이 학교 잠바가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핫한 패션 아이템이 된 것일까?
이에 대한 가장 단순한 답변은 야구잠바 패션의 유행이다. 학교잠바의 형태는 야구잠바의 형태와 유사하다. 허나 야구잠바의 유행이 학교 잠바의 유행을 몰고 왔다는 논리에는 빈틈이 많다. 또한 이 논리는 비수도권 대학의 학교잠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과 학교별로 학교잠바를 입는 학생들의 비율이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없다. 허나 야구잠바 패션의 유행이 없었다면, 즉 야구잠바 패션이 오늘날 20대의 미적 취향을 벗어나는 패션이었다면 학교잠바 패션의 유행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야구 잠바의 유행은 학교 잠바의 유행의 외재적이며, 실증적 조건이다.
그렇다면 학교 잠바를 입고 다니는 대학생들의 무의식적 기저를 살펴보자. 인서울 대학이 아닌 소위 ‘지잡대’의 이름이 새겨진 학교 잠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과 대체로 배치표 서열이 높은 학교일수록 학교잠바가 많이 보이는 경향을 고려해보면, 학교잠바를 입는 행위는 자신의 학벌을 공공연하게 타인에게 공개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기인한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학력자본에 따라 계층별로 자본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차별적으로 취향 소비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굳이 이러한 서양이론가의 말을 빌리지도 않아도 출신 대학에 따른 서열이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다. 매년 출시되는 입시 배치표야말로 이러한 현실을 외설적으로 드러내어준다.
현상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섬세한 질문을 던져야한다. “왜 이러한 학교 잠바의 유행이 강화되었는가?” 적어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학교잠바는 체육전공대학생들의 전유물이었다. 내가 처음 입학을 하던 2007년도만 해도 교내에서 학교잠바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어째서 이러한 공동체의식이 강한 학과의 전유물이 점점 대학생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유행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 체육전공대학생들처럼 모든 대학생들의 공동체의식이 강화되었기 때문인가? 설득력 없는 대답이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원자화된 성향을 보인다.
우선 경제학적 상황을 살펴보자. IMF 이후 대학생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인해 양극화는 심화되고, 비정규직 비율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이에 따라 80년대 대학생들이 무난하게 그렸던 정상적인 생애 과정(대학 졸업 > 정규직 대기업 or 공기업 취업 > 차량 구매 > 결혼 >집 구매> 자녀의 대학교 졸업 및 취직 > 퇴직)을 이제는 꿈꿀 수 없게 되었다. 88세대 담론이 주장하듯이 그나마 정상 생애 과정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대학생들은 많이 잡아야 5%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비정규직이거나 앞날이 불안한 중소 내지 소기업의 정규직이거나 잉여(생산적이기를 포기한자)들이다. 학교잠바를 입고 다니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바로 그 정상생애를 그릴 수 있는 5% 안에 들 가능성이 큰 자들이다. 이러한 경제학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학벌 전쟁 승리의 의미는 더욱 증대되었다. 이제 학벌이 지칭하는 것은 단순히 학벌 서열이라기보다는 생존할 가능성의 유무이다.
허나 재미있는 것은 의외로 한국 사회에서 정점 서열의 학교인 서울대학교의 잠바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사실이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신분제 사회가 공고했던 현실에서는 구별짓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주체들이 구별짓기를 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구별이 단단하게 지어져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열 관계가 확실했던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고 난 후 도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별짓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자본주의는 신분이 아닌 원자화된 개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했다. 무의식적 구별은 없어짐에 따라, 주체들은 자신들을 능동적으로 구별짓기 시작했다. 따라서 인서울 대학생들이 학교잠바를 통해 능동적으로 학벌 구별짓기를 강화한다는 사실은 공고했던 과거 학벌 사회 속에서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었던 인서울 대학생들 또한 불안을 느낀다는 증후가 아닐까? 실제로 오늘날에는 인서울 대학생들 역시 80년대 대학생들이 누렸던 ‘취업자유이용권’을 누릴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규직으로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한다고 해도 자력으로 중산층으로 편입할 가능성은 적어지고 있다.(일단 그들이 자력으로 서울에 있는 집을 구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서울대생들이 학교잠바를 입지 않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즉, 그들이 학교잠바를 입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까지 서울대라는 학력이 이 사회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니스커트가 경제적 불황기의 지표이듯이, 학교 잠바의 유행 역시 또 하나의 경제 위기의 증후가 아닐까? 만약 이러한 가설이 사실이라면, 서울대학교 잠바의 대거 출몰이야 말로 진정한 비상 사이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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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쓰고 나니까 아직 골조 완성되지 못한 무너질랑 말랑한 건물이 떠오르는건 뭘까..몇가지 지 문장들이 너무 두서없이 진행되어서 그런가..좀더 촘촘한 글쓰기가 필요하지 싶다..시간 많을 때 훗날 문제점 분석을 다시 철저히 철저히..
# 2부작 중 1부만하고 마친 티가 확난다. 하지만 나는 분량을 준수하는 모범생임ㅋ
#내년에 1년 휴학을 하고 글쓰기 연습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당.;;
#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필살기를 익히려고 산에 들어가서 열심히 수련을 했는데, 실전에는 필살기 대신 이상한게 나왔다고 할까? 몇달 동안 푸코를 배웠는데..막상 툭 튀어나오는건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부르디외라니....나는 무엇을 공부해온 것일까..
최근에 이와 비슷한 글이 나왔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7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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