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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자의 국가

우기부기 2012. 7. 22. 02:15

 

자기 계발자의 국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읽고-



당신은 기관사이다. 당신이 타고 있는 기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만약 기차가 그대로 달리면 정상 궤도에서 일하고 있는 다섯 명이 죽고. 잽싸게 비상 철로로 방향을 튼다면 한 명의 인부만 죽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얼마 전 방한한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센델의 대표작 정의는 무엇인가의 한 대목이다. 소설가 장정일은 이런 사례들을 보고 저자의 정신 상태와 지적 취약을 의심했다’(무엇이 정의인가?, 41)라고 까지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이것은 풀어야할 문제라기보다 그저 비극이다. 센델의 이러한 질문들은 당신은 어제도 당신의 아들을 때렸습니까?’의 딜레마와 비슷하다. 이 질문에 내가 라고 대답하는 순간, 나는 어제 아들을 때린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아니요라고 대답해도, 어제는 때리지 않았지만, 지금껏 자식을 때린 파렴치한 부모가 된다. , 어떤 대답을 하던 나는 파렴치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센델의 질문 역시 그에 대한 어떤 대답을 하던 우리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질문들은 그것들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서 답을 도출하고, 도출한 답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일 따위로 풀리지 않는다.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보시오! 질문이 잘못되었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인 선택이야말로 이러한 딜레마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5년 마다 치르는 대통령 선거에서 주어진 객관식 보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센델의 예시처럼 가장 덜 나쁜 차악을 선택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이 선택의 결과들은 어떠한가? 사실 이미 대통령의 시나리오는 정해져있다. 민주화 이후 몇 십년동안 높은 수준의 지지율을 받고 취임한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퇴임 할 때쯤이면 민망할 정도로 한줌도 안 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지금껏 해온 그 지겨운 반복 속에 세상은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흥미롭게도 브라질 전 대통령 룰라의 드문 예와 비정상적인 국가형태의 북한의 예를 제외하면, 이러한 정치적 현상은 범세계적인 추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런 바보 같은 짓거리를 반복해서 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왜 주어진 문제틀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해 수십 가지의 유효한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여러 유효한 대답 중 한 가지의 답을 제시하고자한다. 현재 문제틀 자체를 문제화되지 않는 이유는 현재 문제틀 속의 대답 중 하나가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리는 기차 위에서 5명의 인부를 죽이는 것보다 1명의 인부를 죽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그럴듯한 선택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틀 자체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문제틀 속에 있는 그럴듯한 답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대답이 유효하다면, 우리는 이 기존의 문제틀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선택이 문제를 해결해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버려야한다.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기 위해서는 이 선택이 왜 그럴듯하게 보이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는 현재 한국 사회에 주어진 문제틀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선택 즉, 기존 문제틀을 지속시키는 최선의 차악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한국 사회의 대략적인 인지적 지도를 그리는 동시에 기존 문제틀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 최선의 차악을 안철수로 지목하고 싶다. 그에 대한 가공할만한 대중적인 인기는 분명 한국 사회에서 드문 일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찬찬히 살펴보아야할 것은 인간 안철수가 아니라 안철수 현상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을 우리의 문제틀에 맞혀보자면, ‘어째서 안철수가 오늘날 한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최선의 최악으로 여겨지는가?’이다. 안철수 현상의 흥미로운 지점은 안철수가 탈정치의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는 상생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해서 말해왔지만, 그 사회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한 바 없다. 또한 박원순의 선거에 지원을 해준 것 말고는 이렇다한 정치적 행보를 보인바가 없다. 무엇보다 그는 특정 당에 소속되지도, 그렇다고 딱히 특정 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물론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반감이 사회에 팽배하기 때문에, 탈정치적인 이미지 자체가 그의 인기 요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탈정치적 인물이 대선 후보로까지 추앙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왜 안철수인가?

이렇게 돌고 돌아온 질문에 대해 드디어 책,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나설 차례가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리저리 끌고 온 질문 속에서 이 책을 읽을 때, 이 책은 더욱 강해진다. 우리의 질문 속에서 이 책은 더욱 설득력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책의 쓰임이 선명해질 것이다. 저자는 민주화 이후 급격한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어떤 주체화의 권력이 등장했는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을 그렸다. 먼저 그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자본주의를 지배하던 경제적 가상이 위기에 빠졌고,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적 가상이 부상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새롭게 부상한 지식기반경제는 기존의 것과 다른 새로운 경제적 실재를 구성하고, 일상의 경제적 삶 속으로 스며든다. 이에 따라 개인들이 국가와 경제적 사회와 맺는 관계를 새롭게 규정된다. 이 관계는 생애 능력혹은 역량이라는 언표를 중심으로 행복한 개인이란 누구인가?’바람직한 시민이라는 누구인가?’ 그리고 바람직한 노동자란 누구인가?’라는 언표들이 접합된다. 이러한 언표들의 접합은 기존의 언표들을 새로운 규칙에 따라 정렬, 재배치시킨다. 그리하여 서서히 새로운 담론적 질서가 형성되고, 총제적인 주체성의 체제는 말 그대로 구조조정을 받게 된다.

특히 노동 부분에서 인재라는 언표를 중심으로 지식 경영혹은 인재 경영이라는 담론을 통해 노동을 가시화하고 객체화하는 새로운 지식들을 생산해낸다. 이 담론들은 기존의 담론들을 절합(articulation), 재배치시키기도 하고, 노동 주체의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시키기도 하면서 확장된다. 이렇게 생성된 지식은 노동 주체를 대상화하며, 주체화하는 지식/권력으로 기능한다. 이로써 노동 주체 스스로와 맺는 관계, , 노동 주체로서 자신을 주체화하는 체계의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한다. 이제 예속된 노동자로써의 노동 주체가 아닌 개성을 표현하고, 일에 몰입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소비자로서의 노동 주체가 등장한다. 이러한 주체화 속에서 주체들은 자기 자신을 보상과 평가의 대상으로 대상화시킨다. 노동은 외부에서 주체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성질을 띠게 되고, 자신의 욕구와 기업의 욕구를 일치시키는 삶의 태도를 갖게 된다. , 이제 그들은 모두가 1인 기업가의 자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따라 자신을 평가, 감정, 측정, 보상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개발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하는 주체가 자신의 삶을 다루는 윤리적 장 속에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주체가 바로 자기계발의 주체이다. 이 주체는 자기계발담론과 상호 작용하면서 더욱더 자신들의 주체성을 강화시켜나간다. 최근 몇 년간 자기계발 도서들의 폭발적인 인기는 우리가 이 사회에 자기계발의 주체성이 얼마나 지배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기계발 담론 속에서 자아란 분석되고, 진단되는 대상이다. , 우리는 이 담론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문제화시킨다. 이러한 문제화를 통해 주체는 그들이 꿈꾸는 것은 자유의 윤리적 주체가 된다. 다시 말해,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자기 혁명을 통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삶 자체를 경영한다. 요컨대, 자기계발 담론은 자기를 객체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주체화하는 테크놀로지이다.

푸코 혹은 푸코의 눈을 빌린 서동진의 주장은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푸코에게 권력은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형성하고 그 주체가 자신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규정함으로써 주체를 멀리에서지배한다.” 이렇게 권력은 자유에 반하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그것을 통해서작용한다. 그렇게 그것은 새로운 주체화의 방식을 개발해낸다. 정리하자면, 서동진은 근대 자본주의가 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주체들의 주체화 과정, 체제, 방식들을 분석함으로써 오늘날 새로운 자본주의 운동방식을 그려낸다.

여기서 다시 우리의 질문을 떠올리자. “왜 하필이면 왜 안철수인가?” 이제 우리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다. “그가 바로 오늘날 자기계발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의 주체성은 가진 자들이 자신과 가장 닮고 싶은 자가 바로 안철수이기 때문에 그는 오늘날 자신들을 대의해줄 최적의 인물로 부상한 것이다. 기실 자기계발의 화신들이 정치적 인기를 얻는 현상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전 대통령들인 노무현과 이명박 역시 자기계발에 충실한 주체들이었다. 허나 이 둘과 안철수의 자기계발의 성격은 조금 다르다. 노무현은 고졸 출신으로 시작해, 법조인으로 출세하는 자기계발자형이었고, 이명박은 중소기업 직원에서 시작해, 대기업 사장으로 출세하는 자기계발자형이었다. , 그들은 주어진 각자의 영역 가장 아래에서 가장 위로 올라간 능력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안철수는 자신의 영역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자이기도 했지만, 다른 영역을 개척하는 도전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안철수야 말로 끊임없이 자신의 자아를 문제화시키고, ‘자기 혁명을 통해 그저 성공이 아닌 자신의 심리적 만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기계발자의 이상적인 전형이다.

정리하자면, 탈정치의 정치가 안철수가 정치적 인기를 얻는 현상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 주체가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주체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후이다. 이 현상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로의 주체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탈이데올로기의 가면을 쓰고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체성의 확장은 정치의 탈정치화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안철수 현상에도 들어났듯이 자기계발의 정치성 속에 대의를 위한 해주어야할 정당의 중요도는 떨어진다. 또한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의 정치성 속에서 장치는 원활한 자기계발을 위한 장치로써만 기능하도록 최적화된다. 따라서 정치가 개인들의 자기계발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제거되어할 장애물로 인식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통해 우리들은 기존의 문제틀에서 어떤 대통령이 뽑히든,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화는 가속화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기존의 문제틀을 넘기 위해서 기존의 주체성과 다른 새로운 주체성이 열쇠라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책 역시 새로운 주체성을 제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그것을 고민하자며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새로운 주체성의 충분한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이 정확히 안철수 현상의 정반대 방향에 서있기 때문이다.

안철수 현상이 정치의 탈정치화 과정이라면, 이 책은 탈정치적인 것의 정치화시킨다. , 이 책은 탈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을 가시화시키면서, 기실 개인적은 것이 얼마나 사회적인가, 또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고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개인의 주체성에 말려들어간 타자성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져 가는가를 꼼꼼하게 살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자신을 문제시하는 제3의 심급에 기업가를 놓고 있다면, 이 책은 제3의 심급이 바로 고유한 주체성이 아닌 타자성이라는 것은 폭로하고, 그 타자성의 형성 과정을 낱낱이 밝힌다. 이렇게 이 책은 우리 문제화시키는 기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에게 이중의 성찰을 하게 만든다. 요컨대,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는 우리를 암암리에 자유주의로 끌고 가는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했지만, 그 쇠사슬의 존재 형태를 가시화했다. 앞으로 갈 길은 멀지만, 이 책은 새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기존 문제틀 자체에 대한 질문의 가능성 여는 열쇠 중 하나로 충분하다.